✅ 인터뷰 하이라이트

•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개미굴 같은 세계, 클래식
• 언어와 시공간을 뛰어넘은 고전의 깊은 맛
• 클래식 공연에서 졸리면 어쩌나?
• 필연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는 연주자의 자세로
• 취미란 인생의 시련이 닥쳤을 때 찾아가는 방공호이자 피난처
• 취미도 분산투자 합시다!

🧶 클래식 음악에 본격적으로 입덕하고 나서 늘보님한테 생긴 변화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문프랜님이 저번에 나오셔서 이 질문에 '뜨개질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장착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저도 똑같아요. 클래식 렌즈를 삽입 받아서 이제 온 세상이 클래식으로 보이거든요.

예를 들면, 배경 음악으로 클래식을 틀어주는 공간들이 좀 있어요. 특히 서점 가면 정말 맨날 클래식을 틀어주더라고요. 고즈넉한 카페라든가 조금 우아해 보이고 싶은 공간에 가도 항상 클래식이 나오고요. 예전 같았으면 저도 그냥 배경음이나 앰비언스 정도로 흘려보냈을 텐데 이젠 거기에 정신이 집중되는 거죠. 서점에서도 책 읽다 말고 이게 무슨 음악이었는지 속으로 맞춰보고요. (웃음) 배경음으로 흘러가던 게 이제 주인공이 된 거죠. 

그리고 이거는 좀 웃길 수도 있는데, 시간을 클래식 곡 단위로 생각하게 됐어요. 특히 이동할 때요. 예를 들어, '대충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정도의 거리구나', 아니면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두 번 정도 들을 수 있는 거리군', 이런 식으로 단위가 클래식 곡이 된 거예요. 워낙 이동하면서 곡을 많이 들으니까요. 그러니까 온 세상이 클래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달까. 

🧶 클래식에서 배운 삶의 인사이트 같은 것도 있으세요? 

그런 게 참 많아서 인스타툰으로도 그리고 있는데요. (웃음) 제가 연주자들의 삶이나 태도를 반영한 인터뷰 같은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음악 자체라기보다는 음악을 다루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술과 삶을 대하는가를 통해서 많이 배워요.

예전에 손열음 피아니스트가 한 얘기가 있는데요, 피아노를 칠 때 3개의 자아가 필요하대요. 하나는 현재 내가 치고 있는 음악에 집중하는 자아, 또 하나는 과거에 내가 쳤던 음악을 돌이켜보는 자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관망하며 미래와 과거와 현재를 큰 그림으로 올려다보는 자아. 이렇게 3개가 다 동시에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나 싶잖아요. 근데 저는 그게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결국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현재에 가장 집중해야 하는 건 맞지만 적당히 과거도 돌이켜볼 줄 알아야 하고, 미래도 살짝 내다보면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어찌 됐든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죠. 지나간 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미래에 다가올 것을 너무 걱정해 버리면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잖아요. 그거는 공연자도 마찬가지거든요. 현재의 공연을 망쳐버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정말 어렵지만, 그런 중용의 태도가 곧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필연적으로 계속 실패하고 실망하게 되겠지만, 너무 미련 두지 않고 적당히 수용하면서 계속 나아가야 하는 거죠. (인스타툰 '모든 공연은 일종의 실패다')

또... 나이가 많으신 노장의 연주를 보면 힘이 다 빠져 있어요. 뭐랄까, 들숨 없이 날숨으로만 연주하는 것 같달까요. 그만큼 너무 자연스럽고 쉽고 편안하게 연주하신단 말이죠. 그런 연주에선 화려한 기교나 꾸밈이 중요하지 않아요. 가식, 욕심, 자만, 이런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다 내려놓고, 진짜 정수만이 담긴 그런 소리를 내시거든요. 그게 진짜 거장의 경지인 것 같아요. 삶에서도 궁극적으로는 힘을 다 빼고 진정한 정수만 남기고자 하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인스타툰 '우리는 평생 힘 빼는 연습만 하다가 죽는 것 같아.')

🧶 이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것 같은 늘보님의 취미론을 들어볼 차례인데요. (웃음) 늘보님은 취미가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사실 이건 나의 삶이 지금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좀 많이 다를 거 같은데요. 일단 최근에 저한테 취미는 인생의 피난처 혹은 방공호인 것 같아요. 인생을 살면서 위기가 있을 때마다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곳.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이게 있으니까 괜찮아'가 되는 게 취미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한두 개를 깊게 파고 어떤 사람은 여러 군데를 얕게 팔 수도 있겠죠. 이건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최근 들어 최대한 여러 개 파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살다 보면 어떤 계기로든 그 피난처가 없어질 수도 있단 말이에요. (웃음) 뭐든 하나에 쏟는 거는 좀 위험한 것 같거든요.

🧶 분산 투자를 하자는 거군요. 

맞아요. 흥미도 하락이 가장 흔한 이유가 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부상이나 관계 문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저도 얼마 전에 아킬레스가 파열되는 사고를 당하면서 중요한 취미 중 하나였던 현대무용을 못하고 있거든요. 아마 1년간은 못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저한테 타격이 엄청 크더라고요.

수술하기 전날 병원에 누워 있는데, 그때 밤새 클래식 음악을 들었어요. 진짜 클래식 음악이 없었다면 훨씬 많이 무너졌을 것 같더라고요. 제 삶의 큰 부분이었던 현대무용이라는 취미가 무너졌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또 다른 피난처인 클래식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진짜 사람 일은 몰라요. 내가 열심히 파놓은 피난처가 그냥 어느 날 하루아침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라질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 개 만들어놓는 게 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현대무용을 거의 한 8~9년 하셨던 거죠.

네, 정말 깊이 팠는데 그게 지금 반강제로 닫혀있기 때문에... (웃음) 그리고 취미의 정의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내가 자발적으로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지 취미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행동이 아닐지라도요.

🧶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어요? 

사람, 콘텐츠, 수집... 이런 거는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하면, 고양이 집사라는 사실이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거예요. 근데 우리가 취미에 쏟는 깊이나 시간을 생각해 보면, 고양이 집사들이 고양이한테 쏟는 애정도가 절대 뒤지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게 그분들에게 주는 삶의 활력을 생각해보면, 취미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게 있다면 취미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내 마음의 피난처가 된다면요. 

그래서 모든 형태의 덕질이 다 취미라고 생각해요. 내가 쏟는 에너지의 양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는 피난처가 된다면 그게 뭐든지 취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 저도 오늘 오기 전에 궁을 산책하다 왔거든요. 1년에 많이 가면 두 번 정도 궁궐 산책을 해요. 이걸 취미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애매할 수 있지만, 저한테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의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항상 있거든요. 드물지만 주기적으로 하는 행위인데, 그럼 이것도 취미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취미는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겠어요. 

네,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가지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겐 도망갈 무언가가 있다는 게 주는 어떤 단단한 자존감이 있거든요.

🧶 어쩌면 취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너무 좁게 생각해서 그렇지, 늘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넓히다 보면 하나씩은 다 있지 않을까요? 아직 인지하지 못할 뿐.

맞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 보면 그중에 하나쯤은 내가 피난처라고 여기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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