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스타그램 프로필 소개에 '낮에는 글을, 밤에는 실을'이라고 썼더라고요. 프랜님의 삶에서 뜨개질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길래 그렇게까지 정체화하는지 궁금해요.

일단 일과 나를 구분할 수 있는 제일 빠른 방법이 뜨개질이에요. 모니터나 키보드에서 벗어나서 진짜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환경에 있을 수 있거든요. 제가 일을 끝내거나 아니면 스트레스 받았을 때 제일 빠르게 도피할 수 있는 저의 안전지대 같은 느낌이어서 그렇게 썼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일과 나 사이를 분리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에 너무 매몰돼서 저를 한번 잃어봤던 경험이 있거든요. 그때 번아웃이 와서 같은 동료들한테 너무 미안하게도 도망치듯이 나왔어야 했어요. 퇴사 전후로 정신과에 다니면서 약도 복용해봤고, 우울감, 불안감, 대인 기피도 있었어요.

그렇게 퇴사를 하고 갭이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뜨개질을 알게 됐어요. 저는 갭이어 기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가 무기력해지거나 힘들어지려고 할 때마다 뜨개질이 나를 건져낸다고 생각해요. 사람 하나 살렸다고. 그래서 좀 더 의미를 많이 부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 인생에서 암흑기라고 생각했던 때에 어떻게든 다시 양지로 나와서 이렇게 늘보님과 마주보고 앉아서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결국 그때 내가 뜨개라는 취미를 발견했고, 뜨개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다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일과 나 사이의 밸런스를 찾는 거에 많은 도움을 줬고요. 그래서 뜨개를 유난히 좀 대접해주고 싶어요. 

🦥 완전 구원 서사네요. (웃음) 

그러니까요. 근데 이 모든 걸 뜨개는 몰라. (웃음) 저 혼자 뜨개를 사랑하고 뜨개는 잘 몰라요.

🦥 뜨개질에서 배운 삶의 지혜가 있나요?

뜨개실이 많이 엉키기도 하는데, 엉켰을 때 억지로 풀려고 잡아당기면 완전히 매듭 지어져 버리거든요. 그러면 잘라야 돼요. 사람 손으로 풀기 힘들어요. 근데 끝을 잘 찾아서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살살 하다 보면 풀리거든요. 이상한 데서 엉킨 게 아니라 그냥 일자 선이 어떻게 구부러져서 어이없게도 자기들끼리 엉켜 있었던 경우가 많아요. 어르고 달래가면서 푸는 그런 경험을 해보면서 약간 인생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할 때는 더 잘 안 되는데, 결국 문제를 찾고 찾다 보면 그냥 내 안에서 뭔가 엉켜 있었던 거죠. 

그리고 뜨개의 속성하고 저하고 좀 잘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월 1000'이나 '급성장' 같은 단어에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에요. 더 나아져야 한다거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거에 너무 큰 압박을 받거든요. 안빈낙도, 안분지족, 이게 최고라고 생각하거든요. 뜨개질이 좀 그런 것 같아요. 자라나더라도 갑자기 확 자라나는 게 아니라 한 코, 한 코, 한 단, 한 단,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돼 있거든요. 저는 그런 게 좀 좋아요. 요행이 없거든요. 지름길을 찾기보다는 그냥 하나하나 해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나 인생관하고 템포가 맞는 취미인 것 같아요.

🦥 프랜님이 정의하는 취미란 무엇인가요?

저의 언어로 답을 한번 해보자면, 저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안온한 무책임과 자기만족의 세계".

취미의 본질이 뭘까 고민해보니, 어쨌든 일하고 대비되는 것 같더라고요. 일의 반대쪽에 취미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 능력을 활용해서 누가 시키는 일을 해주거나 어떤 일에 책임을 진다거나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게 일이잖아요. 근데 취미는 아무도 나한테 시키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책임질 게 없어요. 누가 나한테 시킨 게 아니기 때문에 성패가 달려있는 게 아니고, 남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도 없죠. 이만큼 잘해야 한다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 게 일이랑 취미랑 제일 다른 점인 것 같아서 무책임이 취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인생에서 모든 걸 다 책임져야 되고, 무조건 남의 기대에 부응해야 되는 일만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잖아요. 그러니까 삶에서 어느 정도는 무책임한 영역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돈을 받고 일하는 거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것들이 있어야겠지만, 반대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고 아무도 나를 압박하지 않는 무책임한 시간도 일정 비율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취미라고 생각했어요. 

취미인데 잘하고 싶고 만족 못하는 것도 저는 재밌는 본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결국 자기 만족인 거잖아요. 다른 사람의 만족이 아니고 나의 만족. 그래서 거기서 오는 주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내가 더 잘하고 싶으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고. 취미인데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으면 또 그냥 소소하고 서툴게 그 영역에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거죠. 그거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가 만족하는 선을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게 취미인 것 같아요. 일할 때는 그게 안 되잖아요. 무조건 클라이언트나 회사나 상대의 기준에 맞춰야 되는 거다 보니까. 이게 저는 취미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을 해요.

🦥 맞아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선에만 만족이 되면 성취감이 바로 오는 거죠. 

그리고 아무도 안 시킨 일을 했을 때 거기에서 내 진짜 무언가가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가 시켜서 하는 거는 내 진짜 모습이 아닌 걸 꺼내서 할 수도 있잖아요. 아무도 안 시켰는데 내가 뭔가를 한다는 거는 진짜 내 안에서 뭔가가 나온다는 거니까. 저는 그게 취미라고 생각해요.

🦥 저도 취미에 한참 미쳐 있을 때는 취미를 하는 내가 진정한 나 같았어요. 나의 온전한 주체성이 있는 것이니까요. 나에게 자아가 두 개 있다면, 일 자아와 취미 자아가 있달까. 

맞아요. 여기서 제 인생관을 얘기해 보고 싶은데요, 취미는 행복을 촘촘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인생은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인생의 디폴트값은 불행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픽사 영화 <소울>을 아시나요? (여기서부터 영화 <소울>의 스포일러 주의!) 거기에서 주인공이 평생을 꿈꾸던 피아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는데요, 그게 그 사람한테는 행복의 목표점이었어요. 그런데 이것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뤘는데도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묘사들이 나와요. 주인공이 진짜로 행복했던 순간들은 사실 어떤 목표를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냥 일상에서 소소하고 사소하게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이었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진짜 오열했는데요, 제가 평소에 하던 생각하고 똑같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행복은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행복은 약간 무지개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무지개가 저기 있어서 막 가잖아요. 근데 가면 무지개는 없어요. 행복을 목표로 설정해버리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요. 행복은 도착점이 아닌 것 같아요. 불행은 암초처럼 깔려 있어서 내가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항상 내 의사와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거고, 우리는 그 사이를 건너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행복은 그 암초 사이 사이에 박혀 있는 점선 같은 거라고요. 그 점선이 촘촘하게 있을 수도 있고 듬성듬성 한 번씩 나타날 수도 있는데, 촘촘하게 만드는 게 취미라고 생각하는 거죠. 

'오늘 너무 힘들었는데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뜨개질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행복해지거든요. 즉각적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취미의 효능 같아요. 뜨개가 아니더라도 그냥 내가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여러 가지 심어놓으면, 인생에 휘몰아치는 불행들은 내가 어쩔 수 없더라도 그 사이사이에 더 촘촘하게 행복을 배치를 해놓을 수 있는 거죠. 저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의미의 취미는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으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그러니 여러분, 취미하세요. (웃음)